제갈 량 [諸葛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전략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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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공명(孔明). 시호 충무(忠武).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山東省 沂水縣) 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 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建安 12)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章武 1)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陝西省 톱縣)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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